남친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산 지 여덟 달 됐어. 전셋집 구할 때까지만 있겠다더니 어느 순간부터 자기 집처럼 굴더라. 그래도 같이 장 보고 밥 해 먹는 게 좋아서 별말 안 했어. 그날도 아침에 내가 구운 식빵 두 장 먹고 나가면서, 회식 때문에 저녁은 혼자 먹으라고 했고.
나는 퇴근해서 족발을 시켰어. 반쯤 먹었는데 남친한테 전화가 오더라. 받으니까 여자 목소리였어. 얘가 너무 취해서 주소를 제대로 못 말한다며 데려갈 수 있겠냐는 거야. 택시를 불러주려고 폰을 받아보니 자꾸 ‘집’에 전화하라고 했대. 그게 내 번호였고.
술집이 걸어서 십 분 거리라 겉옷만 걸치고 나갔어. 회사 사람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테이블에 여자 한 명뿐이더라. 남친은 그 여자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어. 내가 다가가니까 여자가 내 얼굴을 한번 보고, 남친 폰 화면을 다시 보더니 표정이 달라졌어.
“언니가 아직 그 집에서 안 나간다는 분이죠?” 너무 예상 못 한 말이라 바로 대답도 안 나왔어. 여자는 내가 화낼 줄 알았는지 말을 덧붙이더라. 헤어진 건 들었지만 사람이 이렇게 취했는데 길에 둘 수는 없었다고. 내가 물었어. “어느 집이요? 얘가 지금 얹혀사는 제 집이요?”
여자가 남친한테서 어깨를 뺐어. 남친 머리가 벽에 부딪히니까 그제야 눈을 뜨더라. 내가 오늘 아침에도 같이 집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남친이 내 이름부터 불렀어. 평소처럼 끝을 길게 늘이면서.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길래 그냥 빈 의자에 앉았어.
그 여자는 남친이랑 두 달째 만나고 있었대. 나랑은 진작 헤어졌는데 내가 갈 데가 없어서 못 내보내고 있다고 했다는 거야. 자기가 집에 가보고 싶다고 하면, 나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며 말렸대. 나는 그 말을 듣다가 웃음이 났어. 지난주에 걔가 생활비 좀 늦게 줘도 되냐고 하던 얼굴이 생각나서.
여자가 남친 손을 놓더니 반지부터 빼더라. 작은 초록색 돌이 박힌 금반지였어. 내가 그걸 보고 손을 내미니까 여자가 안쪽을 돌려 봤어. “혹시 언니 이름이 여기 새겨진 이름이에요?” 엄마가 내 서른 번째 생일에 해준 반지였어. 돌이 흔들린다고 했더니 남친이 수선 맡겨준다며 가져간 거.
그 여자가 자기 생일은 지난주였다고 했어. 남친이 반지를 주면서 안쪽 각인은 중고로 구해서 남아 있는 거라고 했대. 새것 못 사줘서 미안하다길래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는 거야. 그 말까지 듣고 나니까 남친이 여자를 고르는 기준은 알겠더라. 미안하다는 말부터 믿어주는 사람.
남친이 반지를 집으려고 해서 내가 먼저 가져왔어. 그러니까 나한테 작게 말하더라. “엄마가 해준 건 나중에 얘기하면 안 돼?” 내가 그대로 큰 소리로 다시 물었어.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반지라는 걸 왜 나중에 얘기해?” 여자가 의자를 뒤로 밀었어. 남친은 이제 내 눈도 못 봤고.
나는 탁자 위에 손을 내밀었어. 반지 말고 우리 집 열쇠 달라고. 남친이 집에 가서 얘기하자길래 여기서 기다릴 테니 주머니에서 꺼내라고 했어. 그 여자가 옆에서 자기 가방을 들면서 말하더라. “나한테는 오늘 자고 가도 되냐고 하지 마.” 집에 돌아와 남은 족발을 냉장고에 넣었어. 남친 먹으라고 빼뒀던 몫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