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같은 학교를 나온 애가 있다. 올해로 스무 해째다. 대학은 갈렸고 직장도 달랐지만, 명절마다, 힘든 일 있을 때마다 먼저 연락하는 사이였다.
주변에서는 진작에 “너희 사귀는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때마다 둘 다 손사래를 쳤다. 밥 사고, 술 사고, 이사 도와주고. 그냥 제일 오래된 친구였다.
그런데 올해 서른한 살이 됐다. 주변은 하나둘 결혼 얘기를 꺼내고, 소개팅은 지겹고, 연애는 늘 중간에 끊겼다.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만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한 사람만 보고 정착하고 싶었다.
그날 밤도 평소처럼 그 집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엔 소주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창밖은 이미 불이 다 들어와 있었다. 평소처럼 마시다가, 결국 말해버렸다.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귀자.”
그 새끼가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친구로 지내자. 익숙해서 여자로 안 보여.”
그 자리에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못생겨서? 얼굴에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균은 넘는다고 생각해왔다. 같이 술 마시면 주변 남자들이 먼저 번호를 묻기도 했다. 근데 스무 해를 본 남자만 나를 여자로 안 본다고?
그렇게 말하고선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기대더니, 빈 잔에 술을 다시 따랐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여자로 안 보인다더니, 왜 그렇게 붙는 거야.

“야, 기분 풀고 한잔 더 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잔을 받았고, 그 손이 내 손가락을 스쳤다. 일부러인지 실수인지 모르겠는데, 그 새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소파가 좁아졌다. 원래 반대편에 앉던 애가, 어느새 내 무릎 옆에 앉아 있었다. 티셔츠가 흘러내려 어깨가 살짝 드러났는데, 그 시선이 잠깐 거길 머물렀다. 여자로 안 보인다며.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가 넘었다. 평소처럼 그냥 여기서 자고 가면 되는 밤이었다. 이불은 이미 꺼내져 있었고, 나는 늘 소파에, 그 애는 침대로 갔다. 오늘은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그냥 가. 택시 불러줄게.” 그렇게 말하고선,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가 다시 앉혔다. “아니다. 취했잖아. 그냥 자.”
나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 새끼가 이불 끝을 잡아당기더니, 내 옆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불을 끄지도 않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로 안 보인다는 애가, 내 머리맡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는데 잠이 안 왔다. 스무 해를 친구로 산 사람이, 오늘 처음으로 나를 너무 가까이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새끼는 평소처럼 라면을 끓여놓고 “어제 취해서 미안. 친구인 건 변하지 마”라고 했다. 라면 김이 올라오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여자로 안 보인다는 말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그 새끼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 건지. 스무 해째인데, 처음으로 그 집이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