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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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자영업을 하고 있는 30대인 여성입니다.
남들은 제가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서 기특하다고 하지만, 사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여러분은 하루를 어떻게 사시나요?
전 남들 잘 때 일하고 남들 쉴 때 공부하며 하루 24시간을 48시간 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산 이후라면.. 전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거든요.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인정도 받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하고 싶은게 참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앞에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주변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었고, 노력에 대한 보상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사고무친”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지만 가족만은 제 힘으로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요.
가족, 그 중에서도 특히 엄마의 부재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습니다.
그저 크면서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다였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꽤 좋은 커플이셨고, 아이도 기다리셨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태어난 이후에는 그렇게 싸우셨다고 합니다.
특히 엄마는 항상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서서 아빠에게 사사건건 화를 내셨고
처음에는 출산이 너무 힘들어서,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려니 했던
아빠도 점점 엄마를 피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왜 내가 애 젖을 줘야 하는데? 왜 자꾸 강요를 하냐고, 양심이 좀 있어 봐.
내가 엄마라서 뱃속에 아기를 열 달 품고 있었으면 이제는 아빠가 좀 어떻게 해줘야 할 거 아냐!
왜 아직도 나한테만 아기를 다 떠맡기는건데?
아이고~ 그놈의 모유 소리 지겹다, 지겨워. 아기가 분유 먹으면 큰일 나?
그거 머리 좋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돈 많이 받고 연구해서 만들어낸 거야.
분유 회사에서 오죽 알아서 좋은 재료들 써서 만들었을 텐데 왜 유난이냐고!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유럽이나 미국 분유도 먹인다더라~ 그럼 애들이 미국 아기들이나 유럽 아기들처럼 커진대
그렇게 아기가 걱정되면 그런 거 먹이면 되겠네, 미국 분유나, 유럽 분유.
왜 분유값이 아까워? 그럼 돈을 더 벌어 오던가 남자가 기껏 쪼잔하게
지금 분유값 아까워서 나한테 이래?
왜 기저귀는 빨아 쓰라고 안해? 그래~ 빨아 쓰자.
그게 아기한테 좋겠네~ 그러니낀 그건 남편이 해야지,
당신이 아기 기저귀 좀 빨아서 말리고 다림질도 좀 해!
적어도 앞으로 열 달은 아빠가 다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아빠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로 자라난 분이셨습니다.
세상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기를 안는 것도 어색하고
당장 절절한 부성애가 생긴 것도 아닌데다가 부인의 강요 아래 기저귀를 가는 것도,
분유를 먹이는 것도 어색해하는 그런 평범한 남자였던 거죠.
그러니 두 분의 싸움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나랑 결혼한 거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너 나랑 결혼하자고 할 때 뭐라고 했어?
나 행복하게 해준다며? 항상 웃게만 해준다며? 그런데 지금 이게 행복한 거야?
웃고 있는 거야? 이 사기꾼아!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왜 이러고 살아, 왜!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나 망했어. 이제 다 끝났다고.
내 인생은 너 때문에 끝났어.

엄마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싸우고 울고 불고 하시고는 쓰러져서 잠만 주무셨고
아빠는 듣다가 도망치듯 집을 나가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 할머니 차지가 돼버린 거죠.
할머니도 첫 손주이자 유일한 손녀인 제가 예쁘긴 하셨지만
제가 태어나고 집에 싸움이 끊이지 않으니 그것도 참 힘드셨다고 합니다.

-아니 이렇게 이쁜 아기를 두고 왜들 싸워! 앞으로 이 애를 어떻게 키울지,
뭘로 키울지, 어떻게 돈을 벌어서 뭘 해줄지 그런 것들만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좋은 생각만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건데,
아이고~ 제발 그만 좀 싸워!

그러나 싸움은 계속되었고 그러다가 결국 끝이 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빠만 보면 울면서 싸우고 소리 지르고 하던 엄마가
제가 100일도 되기 전인 어느 날 편지 한 장만 써놓고 집을 나가 버리신 거죠.

-여러 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 도저히 이 아이만 보고 살 자신이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결혼한 건데, 이 사람은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없고
전 한순간 한순간 너무 치욕 같습니다.
전 제 행복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니 절 찾지 말아주세요.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끝난 거죠. 엄마는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가셨고,
동네에는 그게 엄마가 바람이 나서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엄마가 다른 남자랑 함께 있다는 걸 봤다는 동네 아줌마가 계셨거든요.

-세상 불쌍한 것이 엄마 품 모르는 것인데, 아휴~ 우리 불쌍한 영미, 우리 불쌍한 영미
으휴 세상에~ 네 애미년은 어떻게 이 어린 것을 두고 바람이 나냐.. 바람이 나길..
으휴~ 못된 년, 벼락 맞을 년.
아 이런 꼬물거리는게 보고 싶지도 않나, 눈에 밟히지도 않나.
아 도대체 어떻게 한 번을 찾지 않냐, 독하기도 독한 년 같으니라고

그 후로 전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 아빠도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셨고, 여기저기 밖으로만 도셨습니다.
처음에는 엄마를 찾으러 다니면서 엄마를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을 찾아가기도 하셨고, 속이 상하면 술에 취해서 하루종일 쓰러져 자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셨고
하루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술에 빠진 아빠는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고,
일해서 번 돈도 술값으로 날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죠.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가끔 집에 돌아오면 생활비라고 몇 푼 던져주셨지만, 그것도 흔치 않는 일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절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 할머니는 젖먹이인 저를 키우면서
일을 나가실 수도 없으니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알아보셨지만,
저희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것도 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할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저를 업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기도 하셨고,
너무 춥거나 더워서 저를 데리고 나갈 수 없을 땐,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상자 접기나 인형 눈알 붙이기 같은 일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로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은 불과 몇천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날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기 엄마.. 나 저 윗집 사는데 얼굴 본 적 있지?
아 미안해.. 내가 다른게 아니라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혹시.. 혹시 말이야.. 애기 옷 작아진 거 있으면 나 좀 줘.
아휴, 애기들 옷이야 금방 금방 크는데 옷 사기가 아까워서 그래.
비슷한 개월 수면 뭐.. 우리 애가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라서 그런가,
그냥 봐도 아기 엄마네 아기가 훨씬 크네~
그러니까, 그 옷 이제 우리 좀 줘.
아이, 그리고 혹시 따로 뭐 남는 거 없어?

딸랑이나 장난감 같은 거.. 어.. 어.. 그게 이유식이야?
어우 그래.. 요즘은 그런 거 먹인다고 하는 것 같더니, 그게 그거야?
아,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건데?
미안해, 내가 너무 염치가 없는데, 혹시 이유식 만들 때
우리 아기 것도 좀 같이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내가 재료는 어떻게 준비해 다 줄게.
세상에 아휴~ 그래도 어떻게 그래.
아이, 고마워요. 아기 엄마.. 아 고마워요..
복 받을 거야.

갑작스럽게 떠안게 된 아기,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뭘 해줘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셔서
주변에 좋은 분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특히 제가 두 돌이 되기 전까지 조심해야 하는 음식들이 있거나,
갑자기 아프거나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저를 붙잡고 우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제가 걸어다니고 기저귀를 떼고 장난감이 없어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면서 할머니와 비슷한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셨다고 합니다.
예전 저희 집에서는 어떤 메뉴를 먹을지 그날 구할 수 있는 재료에 따라서 달라졌습니다.
늦은 저녁, 시장에서 상인분들이 가게나 노점을 정리할 시간이 되면 저와 할머니는 손을 꼭 잡고
재료를 구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면 그날 팔고 식재료들을 떨이로 싸게 주시거나
마음씨 좋은 분들은 어차피 못 파는 것이라.며 그냥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시금치나 콩나물 같은 야채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고기를 발려내고 남은 뼈다귀거나,
굳어서 더 이상 팔 수 없는 빵이나 떡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 할머니는 그 재료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오거나 받아오셔서
정성을 다해서 손질하셨습니다.
재료 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시면서,
그 재료들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아주 맛있는 요리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할머니는 저를 많이 안아주려고 하셨고, 사랑해 주셨고,
누가 건들지 못하게 끼고 돌면서 아껴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가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을 때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술을 끊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에 다니시다가
어딘가에 정착을 하셨다고 하는데 솔직히 제 기억엔 엄마만큼이나 본 기억이 없는 아빠였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가끔씩 목돈을 보내주시는 아빠 덕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기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전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에 가니 나라에서 주는게 많아지더군요.
우유도 공짜로 주고 급식도 공짜로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버거웠으니 공부란 건 당연히 신경도 쓰지 못한 상태였죠.
그래서 기역, 니은 한글도 모르고 들어간 학교였는데 오히려 그래서였을까요?
공부란 걸 처음 해보니 정말 재밌더군요.
글자를 배우니 책이란 걸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숫자를 배우니 가게에서 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 간다, 텔레비전을 본다,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전 학원 갈 돈도 없고 집에 텔레비전도 없고 장난감이나 다른 것도 없으니
그저 교과서로 공부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할머니를 도와드리러 시장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예,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할머니는 아빠가 보내주셨던 돈으로
시장통에 작은 자리를 사셨습니다.
폐지를 줍는 대신 시장틈에서 조그맣게 노점을 펴고 장사를 시작하실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혼자 학교에 가고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을만큼 컸으니
할머니도 저를 떼어놓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신 거였죠.
큰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몸이 덜 힘들어 지셔서
전 그걸로 너무나 좋았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전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것도 심심해지면, 시장으로 나가 할머니나
주변 분들의 심부름을 해드렸고, 조금씩 용돈을 받거나 간식 같은 것들을 선물로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웬만한 야채나 생선들을 다 다듬고 손질할만큼
일이 익숙해졌습니다. 친구들은 돈이 없어서 자기들과 마시는 것을 먹으러 갈 수 없고,
예쁜 옷을 사러 갈 수 없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다닐 수 없는
제가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시장에서 만나는 어른들도 제가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끼니 굶는 일 없고 할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남들 노는 시간에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할머니 옆에서 일을 돕다보니
전 다른 아이들보다 좋은 성적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교과서만 보면서 공부를 했고,
운이 좋을 땐 선생님이 교사용으로 나왔던 문제집들을 모아서 주시면
그것들로 공부를 했습니다.
어떨 땐 고물상 사장님이 모아두신 폐지에서 멀쩡한 참고서나
책들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 전 그게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풀고 또 풀면서,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럼 시험을 봐도 모르는 문제가 없었고
항상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할머니께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얘가 내 손녀야. 아니, 어떻게든 애가 할 줄 아는게 공부뿐이네!
아, 어떻게 맨날 이렇게 100점만 받아와?
아휴~ 이러니 친구들이 샘이 나서 놀아나 주겠어?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아휴~ 도대체 못하는게 뭔지 모르겠어.
아이~ 얘가 날 닮아서 이런가, 크면 뭐가 될라고 이러나.

할머니는 그렇게 시험지를 들고 시장통을 돌면서 자랑을 하셨고
그러면 전 또 그렇게 좋아하시는 할머니가 좋아서
더 열심히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 전교에서도 손꼽히게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땐 또 그랬습니다. 성적이 좋으면 반장 후보가 되었고,
그럼 또 어느새 반장도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반은 반장 엄마들이 이것저것 해서 돌리거나
선생님 선물도 사주고 반 일도 했지만,
전 그저 선생님을 잘 돕고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반장이었습니다.
제가 반장인 반에서는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았고,
친구들의 공부도 도와주다보니 반 성적도 올라가고
그럼 저는 또 다음에 반장이 되고.. 그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학생으로서 열심히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을 때, 전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예전에 비해서야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빠가 가끔씩 돈을 보내주시기는 하셨지만 규칙적인 것도 아니었고
언제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돈이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가 건강하시지만 언제 일을 못하실 정도로 힘들어지실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제가 병원비를 대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전 아무래도 제가 가장이 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 선생님들이나 할머니의 만류에도 실업계 고등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얼른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서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모시고 싶었고,
제가 공부를 좋아하고 성적이 좋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전 그 학교에서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학교의 허락하에 아르바이트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을 드나들면서 했던 손기술이 있다보니
어느 식당에 가던 사랑받는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아휴~ 영미씨 덕분에 살았어!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이렇게 재료도 잘 보고 손질도 잘해?
평소 요리에 관심이 있었어? 엄마 많이 도와드렸나봐~
영미씨 엄마 너무 좋겠다~ 이렇게 착한 딸이 있어서~
어떻게? 학교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울 거야?
나는 영미씨 언제든 우리 가게 정직원으로 받아줄 용의가 있는데 말이야!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중 시간당 페이를 가장 잘 주던 일식집 사장님은
절 특히나 예뻐해 주셨습니다.
다른 곳과 다르게 반찬 재사용 같은 지저분한 짓도 안 하셨고
좋은 재료를 새벽마다 공수해서 정성스럽게 다듬어서 요리를 만드셨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셔서
손님들한테 시식도 부탁하고 직원들에게도 먹게 해주시는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이 많은 분이라 아직 고등학생인 제가 일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해 주시면서 남은 음식들이나 재료들을 잘 챙겨주셔서
덕분에 할머니한테 좋은 음식들을 가져다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여학생이 식당에서 일하면 만만하게 보는 손님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일하던 식당이 고급 일식집이기는 했지만, 술도 파는 곳이었고
손님들도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셨기 때문에
식당에서 일하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일하면 얼마나 받아?
아우~ 세상에, 그거 받고 그렇게 다리 퉁퉁 불게 일하는 거야?
아휴.. 안쓰럽기도 하지.
아, 이러지 말고 오빠랑 가끔 볼까? 응?
오빠랑 일주일에 한 번씩 따로 만나면
네가 지금 월급으로 받는 거 그거 3배 줄게! 좋잖아~
편하게 일주일에 하루 나 만나서 놀면
여기서 하루 10시간씩 일해서 받는 것보다 3배를 더 준다는데~

매달 생활비를 줄 테니 들어 앉는다는 스폰서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아유~ 여기 술 좀 따라봐.
살살살, 넘치지 않게 다소~곳하게.
아, 아이구 잘하네~ 기특도 하지.
아직 어린데 너무 고생하네,
이게 다 내가 아빠 같고 딸 보는 것 같은 마음에서 그러는 거야.
이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얼른 따르고 여기 여기 앉아 봐!
내가 한 잔 따라 줄테니까.
아휴, 미성년자면 뭐 어때?
어른하고 있는데~ 쭉~ 가끔 마셔봐.
내가 오늘 주도가 뭔지 가르쳐 줄테니까.

아예 술집 종업원 취급을 하며 추근거리는 손님도 많았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손님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벌벌 떨면서
그대로 굳어 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히어로처럼 등장해서 절 구해주시던게 가게 사장님이셨습니다.

-거기, 손님 저희 직원한테 그따위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수작질을 하실 거면
당장 그대로 일어나서 엉덩이 안 보일 정도로 사라져 주시죠~
그러다 저한테 엉덩이 채이시면 아프실 텐데, 그럼 큰일이시잖아요.
아, 그리고 한 달에 얼마를 준다고요?
아니 쓰려면 좀 크게 쓰던가.. 어떻게 이렇게 이쁘고 어린애한테
그런 푼돈을 주면서~ 개도 안 물어갈 늙다리 변태 영감을 만나달라고 해요?
거기에 0을 2개쯤 더 붙여도 생각해 볼   까 말까인데,
왜? 머리카락 없는 것처럼 돈도 없나.
그럼, 손가락이나 빨고 있지! 왜 어리고 이쁜 애한테 수작질인데?

전 혹시나 저러다 손님이 떨어질까봐 걱정을 했지만
사장님은 저딴 손님은 안 오는게 가게에 좋은 일이라면서
항상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딸? 아빠? 참, 손님은 딸한테 그렇게 추근거리면서 술 따르라고 시키시나봐요?
아이고~ 따님은 좋으시겠어요.
어디 나가서 아빠처럼 늙고 배는 툭 튀어나온 변태 영감한테 술 잘 따라줘서 이쁨 받겠어서..
엇, 막말이라뇨?
당신이 먼저 우리 직원한테 딸 같네, 어쩌나 하면서 수작 걸었잖아!
진짜 딸 같아서 그러는 거면 왜!
왜? 다른 노친네들이 댁 딸한테 댁이 하는것처럼
똑같이 굴어도 상관없는 거 아냐?
아, 도대체 양심이라곤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당신 같은 손님 안 받아도 우리 가게 안 망하니까
당장 안 꺼져?

여걸 타입의 사장님은 제가 딸 같다고 하면서
예뻐해 주시는 것도 모자라서
혹시라도 저한테 이상하게 구는 손님이 계시면
참지 않고 쫓아내 주셨죠.
덕분에 전 그곳에서 착실하게 일을 배우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아서 다른 가게에서 스카웃 제안이 들어왔어도
제가 힘들 때 도와주셨던 사장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의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어느덧 30대가 된 전 이제 경력을 인정받아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가게 사장님은 언제나 든든한 큰 언니처럼 저를 지켜주셨고 아껴주셨습니다.

-영미씨, 윽! 진짜 내 딸 안 할 거야?
아깝다~ 나한테 큰 아들만 있었어도 며느리 사보면 딱 되는 건데..
아~ 왜 난 이렇게 결혼을 늦게 했을까..

그날도 사장님은 저를 불러 앉혀놓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셨습니다.

-사장님~ 나이 차이 그까짓 거, 뭐 어때요!
20살 차? 까짓거, 극복할 수 있어요.
그래도 미성년자랑 결혼은 힘들테니까
사장님 아들한테 얼른 커서 20살이 되면
이 누나가 찾아간다고 해주세요.
까짓 거 10년 금방 가요.

이런 시덥잖은 농담 끝에 사장님은 제가 놀랄 만한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럼~ 내가 우리 예비 며느리한테 부탁 하나 해도 되나?
별건 아니고.. 어때? 너 우리 가게 인수 받을래?

저도 언젠가는 열심히 돈을 모아 그럼 멋지고 큰 가게를 인수할 꿈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당장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는 걸 뻔히 아는
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그것 역시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어, 저야 좋죠.
그럼 예비 며느리인만큼 파격적인 가격으로 넘겨주세요!
한.. 100만원 어때요?

그런데 그런 제 농담에 사장님은 웃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죠.

-진짜 할 생각만 있으면 100만원도 필요 없어!
내가 그냥 넘겨줄게.

전 여전히 농담인 줄 알고 있었지만 사장님은 진지했습니다.

-이제 농담 그만하고, 사실은 우리 아들이 이번에 유학을 가게 됐어.
그놈의 핏줄이 뭔지. 지 아빠 닮아서 공치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니
유명한 데에서 상을 좀 많이 탔나봐~
아무래도 평생 골프 치면서 선수를 하던지, 그게 아니라도 골프를 전공해서
그쪽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네.. 하여 어쩌겠어?
아직 10살이라곤 해도 하고 싶은게 확실하다는데!
그래서 알아보니까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힘들 것 같고, 일찌감치 유학을 가야겠더라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난 거기 따라가서 가게 하나 더 열려고는 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한 가게 그냥 홀랑 팔아먹고 가려니까
발이 떨어지지가 않네..
그런데! 내가 영미씨면 믿잖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이 가게를 사랑하고 지켜줄 것 같아서 말이야.
아, 물론 공짜로 준다고 아예 돈을 안 받겠다는 건 아니야~
내가 아무리 영미씨가 좋아도 이 가게가 얼만데!
월급 사장해! 바지 사장, 그런데 내가 앞으로 몇십년은 안 돌아올 것 같으니까
아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바지 사장으로 있으면서 순수익에서 40%만 나한테 보내줘~
그러다가 돈 모아서 나한테 아예 가게 사면 더 좋고~
어때? 그래 줄 수 있지?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이 정도 가게를 30대라는 나이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죠.
평생 쓸 운을 여기에 다 써버린 건 아닌지 무서울 정도의 행운이었습니다.
전 그렇게 강남에서도 고급 일식집의 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빠져나갔지만, 모든 직원이 변함없이 일해주기로 했고
전 이제 새로운 사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버는 돈도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죠.
덕분에 가게에 있는 시간이 많아 돈 쓸 시간도 없는 저 대신
할머니를 온천이며 맛집이며 친구분들과 용돈 지어드리며 마음껏 보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나 싶게 그렇게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이 정말 맞는 거겠죠.
제가 사장이 되기 전 주방장으로 일할 때 저와 항상 신경전을 벌이던 다른 주방장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초밥과 일식을 배운 유학파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 요리사였습니다.
일식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며 체온 높은 여자가 초밥을 쥐는 건
일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시하기 일쑤였고,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일본 요리에 정통한 사람이고,
일본의 요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만 목표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살짝씩 음식을 바꾸는
여자 요리사인 저를 항상 무시했고 다툼이 많았습니다.

-아니, 사장님은 왜 이 따위를 요리라고 내는 사람을 나랑 같은 주방에 세우는 거야?
자존심 상하게! 아, 뭐야 화사라고 세워놓은 건가.. 그림 좀 되라고?
아 그럴 거면 뭐 더 어리고 이쁜 여자들을 세워놓지..
아, 이건 뭐 어중간한 늙다리 여자 요리사를 세워놓고
도대체 사장님 머릿속을 모르겠다니까!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항상 절 무시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인지라
제가 가게를 인수 받으면서 제일 신경 쓰였던 것도 그 남자 요리사였습니다.
제가 사장이 되면 당장 그만두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거든요.
당장 저도 사장 업무를 보게 되면 주방에 자리가 하나 비게 되고
밑에서 도움을 주던 직원들이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 남자 요리사가 있어야 가게가 유지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제가 사장이 된 후, 그 남자 요리사는 축하해주며 쿨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와! 나 몰랐는데 영미씨 능력이 있었네? 아니..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떻게 이 큰 가게를 덜컥 인수한 거야? 맨날 힘들다 어렵다 하다보니 거짓말이었던 거지?
역시 여자들 말은 다 거짓말이야! 믿을게 못 된다니까~

여전히 여자를 무시하는 그 말투는 변함이 없었지만, 실력은 있는 편이었으니
그만두지만 않겠다고 하면 그런 헛소리쯤 대강 넘길 수 있었습니다.
대신 전 가게가 끝나면 밑에 직원들에게 요리 연습을 시키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그 남자 요리사도 협조적으로 밑에 직원들의 교육을 도왔습니다.
전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이 편견이었구나 반성하면서 고마워했죠.
그러던 중 가게 문을 닫고 직원들도 모두 돌려보내고 뒷정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고~ 힘들었다. 아이고~ 벌써 자정이 넘었네.
이렇게 열심히 연습 봐 준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우리 영미 사장, 아 나 이렇게 노력하는데 상 안 줘?
별건 필요 없고 우리 좋은 술 좀 따자!
어, 그래 저거 저거.. 저게 가격대비 술맛이 아주 좋아!
내가 안주 만들어올테니까 우리 영미 사장 나랑 한잔하자!
우리도 이제 벌써 몇 년째인데~
술 한잔하면서 서로 속 이야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래.. 저 사람도 나랑 으르렁거리던 관계가 몇 년인데
이렇게 내가 윗사람이 됐으니 편하지 않겠지..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워서 그깟 비싼 술 한 병 따는 거 뭐 어렵겠나 했습니다.
저도 참.. 그렇게 수많은 쓰레기를 경험해 놓고는 또 방심하고 말았습니다.

-영미 사장, 난 말이야.. 여자는 남자의 보호 아래 있는게 최고라고 생각해.
그게 행복이지~ 내가 영미 사장, 남자한테 인기 없는 거 알지.
아, 그렇게 뻗대고 일만 하다가 나이는 들었지,
나긋나긋한 맛은 없지, 아,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
그래도 난 영미 사장이야 세상 사는게 힘드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데 영미 사장, 영미 사장이 세상 사는게 힘든게 바로 남자가 없어서야~
아, 나처럼 듬직한 남자가 보호자로 있으면 영미 사장도 세상 사는게 많이 행복해질 거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들어보려니
이건 뭐 헛소리가 끝없이 나오더군요.

-요리장님 취하신 것 같으니까 오늘은 파하시죠.
오늘 도와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수고 많으셨고 내일은 1시간 늦게 출근하세요.
제가 재료 손질까지 알려줄 겸 다른 요리사들하고 준비해 놓을게요.

그러나 좋게 파려고 하니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아니~ 내가 방금 한 말 뭘로들은 거야?
아, 그렇게 뻣뻣하게 굴면 안 된다니까!
자, 그러지 말고 이리 와봐~ 내가 예뻐해 줄테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영미 사장이 카운터 보고 내가 주방 보고
아, 그렇게 부부가 이 가게 운영하면 얼마나 좋아?
아, 그럼 누가 영미 사장을 무시하겠어?

결국 전 정확히 선을 그을 필요를 느꼈죠.

-요리장님 이만 들어가세요.
지금까지, 딱 지금까지 한 말은 술에 취해서 한 말이고 실수라고 넘어가 드릴게요.
그러나 여기까지예요.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하면 그대로 안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나쁜 건지 한마디만 더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경고를 했더니
말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몸으로 덤비더군요.
키스라도 하려는데 몸으로 밀어붙이면서 입술이 가까이 오는데
으아 정말 혐오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전 바로 고민 없이 옆에 있던 술병을 들어서 머리통을 후려쳤습니다.
다행히 예전 사장님 밑에서 단련된 몸, 진상을 때릴 때 어느 정도 강도로 때려야 하는지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었죠. 후유증은 남기지 않고 딱 기절할 정도랄까요?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한대 맞은 요리장은 그대로 쓰러졌고,
전 그대로 경찰을 불러 cctv를 제출하며 요리장을 신고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가게에서 해고했습니다.
요리장도 저를 폭행으로 고소했지만 cctv의 정확하게 찍힌 모든 상황에
바로 정당방위가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될까봐 당장 자르지 못하고 있었던 건데
결국 하나 남은 요리장까지 자르고 나니 제가 다시 주방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장일과 주방일이 마구 섞이면서 안그래도 없는 정신이 더 없어지더군요.
급하게 구인광고를 냈고 면접을 보러 오는 분들은 많았지만,
의외로 잘 맞는 분이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끌리는 분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요?
오죽했으면 “그 변태 같은 요리장을 참고 넘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분이 나타났습니다.
일식은 물론 한식과 중식 모두 자격증이 있으셨고 각자의 가게들에서 경력들도 많으셨고
그 중에서도 일식에 관련해서 상당히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계신 아주머니셨습니다.
직전에 일하고 계셨던 가게도 일식을 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다고 하는
최근에 가장 핫한 가게였습니다.
손님들도 점잖고 음식 맛을 아시는 분들로만 오신다고 해서 저도 언젠가 목표로 하고 있던 그런 가게였죠.
그런데 그런 가게의 주방장이셨던 분이 저희 가게로 면접을 보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50대긴 하셨지만 아직 한참은 더 주방을 지킬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희 가게에.. 아잇, 물론 저에겐 너무 감사하지만
워낙 좋은 가게에 계셨던 거라서요.
혹시.. 전 가게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셨던 건가요?
아니면 저희 가게로 오고 싶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걸까요?
아, 그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면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러자 그 요리사님은 가만히 저를 쳐다보시다가 말씀하시더군요.

-사장님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손 한번만 잡아봐도 될까요?

저는 제 질문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여자 요리사님이라 거부감이 없이 제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리사님은 제 손을 가만히 보시더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제 손을 잡고는 가만히 쓰다듬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눈을 가만히 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잘 자라줘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며 그 요리사님을 보는데
문득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보는 얼굴과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자
전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잡아 뺐습니다.

-아, 누구시죠?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마.. 저를 낳아주신 분인가요?

저도 모르게 차갑게 말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엄마라는 존재가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평생 부모님 결혼사진 속에서만 본 엄마라는 존재,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젖먹이를 두고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엄마,
그 엄마를 잊지 못해서 힘들어하다가 결국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던 아빠,
그렇게 혼자 남겨진 절 힘들게 키우신 할머니,
제가 힘들었던 시절의 원인이 모두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혹시나 제 엄마인가 했던 그 요리사님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사장님 엄마면 얼마나 좋겠을까요?
지금 사장님 엄마가 살아 있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네요..
전 사장님 엄마가 아니라 사장님 엄마의 언니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고마워라.. 어쩌면 이렇게 이쁘게 커줬어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는데, 너무 그리웠는데 이제야 보네요.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줘서, 내 동생을 꼭 닮게 이쁘게 있어줘서 너무나 고마워요.

전 그렇게 있는지도 몰랐던 이모를 30살이 넘어서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내 동생은 아이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임신한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때 좋아하면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신나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나요.
입덧을 해도 좋다고 했어요.
이게 다 우리 아기가 뱃속에서 먹고 싶은 거 찾는 거라면서
벌써부터 이렇게 건강하게 있다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면서요.
그런데 임신을 한 뒤에 동생이 자꾸 살이 빠져 가는 거예요.

전 이모를 통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에야 살이 빠져도 다 입덧 때문인 줄 알았죠..
어느 정도 음식을 먹게 된 후로도 살이 빠지길래, 그저 입맛이 돌아오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가 하면서 더 챙겨 먹이려고만 했었죠.
그런데 어떻게 된게 거의 막달이 되어가는데도
배만 볼록하니 튀어나오지 팔다리는 말라만 가고
얼굴살도 홀쭉하니 빠져가는게 이상하더라고요.
그 혈색 좋던 얼굴이 거무티티해지고, 눈은 노랗게 황달이 생기고,
아, 이건 어떻게 봐도 큰일이다 싶은데
동생이나 동생 남편이나 아기 가져서 힘들어서 그런거다,
아기 낳으면 다 괜찮아질거다, 그 소리만 했어요.

나랑 엄마가 검사라도 좀 해보자고 해도
혹시 뱃속에 있는 아기한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상한 약을 쓸 수도 없고
엑스레이도 찍을 수 없다면서 버티더라고요.
그렇게 사장님이 태어났는데..
이건 어떻게 봐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기 낳고 누워있는 동생을 그대로 검사실로 보냈어요.
모든 검사 그냥 다 해봤죠.
피도 뽑고 mri도 찍고 ct도 찍고 그랬더니 간암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말기.. 젊어서 진행도 빨랐고, 아픈 증상이 있었어도
다 임신 때문이라니 하고 무식하게 넘어간 탓에
아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몸에 다 퍼진 거였죠.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남자와 바람이 나서 저를 버리고 갔다는 엄마가 사실은
간암 말기에 시한부 환자였다뇨.
그것도 저를 뱃속에 데리고 있느라 치료 시기까지 놓쳤던 거라니..

-언니, 나 어떡해.. 나 어쩌면 좋아, 내가 없으면 이 아기 엄마 없이 자라는 거야?
내가 건강하지 못해서 이 아기를 엄마 없이 자라게 만들어 버린 거야?
언니 나 어쩌면 좋아.. 나 살고 싶은데 나 살아서 이 아기가 학교 다니는 것도 보고 싶고,
결혼하는 것도 보고 싶고 나중에 아기 낳으면 손주도 봐 주고 그러고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언니? 나 죽는다는데 어떻게 언니!

엄마는 자신의 병을 알게 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충격이 너무 커서 차마 가족들에겐 이야기하지도 못했고,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거였죠.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가족들 몰래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 때문에 저에게 젖을 물릴 수도 없었고,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것 때문에 아기를 마음껏 안아줄 수도 없었던 거였죠.

– 안 되겠다. 너 이러다 진짜 죽겠다.
아기가 눈앞에 있는데 안아주지도 못하고 젖도 못 먹이니
니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
이러지 말고 차라리 얼른 치료를 받고 건강해져서
니 아기 마음껏 안아주자? 응?

이모는 안 그래도 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가
저 때문에 더 안절부절 못하자 그런 제안을 하셨다고 합니다.
엄마도 얼른 건강해지려는 의욕이 있었고
치료도 열심히 받으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신 거죠.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일뿐,
아빠에게는 병원에서 길어야 3개월이라고 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신이 아프다는 것.
그러나 열심히 치료를 받고 있으니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주는 것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없더라도 저와 아빠가 잘 살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
정을 떼려고 그렇게 아빠와 싸우신 거였죠.
그럼 엄마가 혹시 떠나더라도 마음 다잡고
저를 키우면서 잘 사실 거라고,
그리고 혹시 치료에 성공해서 돌아와서 사정을 설명하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리라고요.
그러나 결국 임신으로 인해 병이 깊어졌던 엄마는
치료 시기를 놓친 까닭과 저를 너무 애달파 하던 마음이 커서
열심히 치료를 받으셨지만, 3개월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신 거죠.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모가 저희 집을 찾아갔지만
모든 사정을 들으신 할머니는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정 떼고 갔으면 충분하지, 뭘 또 찾아와요.
우리 아들 한번 힘들게 해서 사람 반 병신을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서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살라고요.
차라리 미워하면서 그 독한 마음으로 살라고 둬요.
어차피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뭐가 남은 사람을 위해서인지 잘 생각해 봐요. 가요.
그리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요!

그때 할머니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셨던 거겠죠.
아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일로 힘들어하며
자식도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제가 그렇게 힘들게 클 줄 알았다면
좀 더 다른 선택을 하셨겠죠.
그래서 전 그 이야기를 듣고도 차마 할머니를 원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장님 할머니는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엄마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닌건 너무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그땐 동생이 어딘가에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라서 그랬는지
그 생각에 동의했고요.
그래서 동생이 보고 싶으면 가끔씩 몰래 가서 훔쳐보곤 했어요.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순 없었는데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씩씩하게 사는게 너무 기특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젠 모든 걸 다 알아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지 싶어서요.
이제 우리 동생이 세상을 떠난 나이보다 사장님이 나이가 더 많아졌어요.
그러니까.. 부디 우리 동생 몸만큼 더 오래 살고 더 행복하고.. 그래 줘요.

전 이모를 안고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후 그렇게 울어본 적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 이모라는 가족을 찾았습니다.
이모는 저희 식당으로 옮겨 오셨고
누구보다 믿음직하게 저희 주방을 지켜주셨습니다.
요리솜씨는 물론 성격도 좋으시고 카리스마 있게 직원들을 대해주시는 덕에
저희 가게에 시그니처 메뉴들이 늘어나기까지 했으니까요.
사정을 알게 된 할머니도 이모를 만나서
그동안에 쌓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서로 쌓인 오해도 풀고, 응어리도 풀고,
이제는 엄마가 계신 납골당 위치도 알게 되어
보고 싶을 때 인사를 하러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몰랐지만 엄마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고 보고 싶기도 해서
지금도 수시로 납골당을 찾고 있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한국에 들어온 아빠에게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아빠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이해하고 또 미안해하시면서
이젠 저와 함께 납골당에 다니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이면 엄마와 데이트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십니다.
엄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빠는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는지
이젠 더 이상 배를 타지 않으시게 되셔서
늦었지만 할머니와 아빠 전 한 집에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두 분이 틈만 나면 저에게 “결혼해라, 남자 만나라”
잔소리를 하시는 것만 빼면 전 여전히 행복합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인연을 만날지, 어떤 시련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잘 극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때도 잘 보냈으니까요.
그러니 제 행복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행복하세요.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젖도 안 뗀 나를 할머니에게 버리고 다름남자와 바람난 엄마” 30년 인생을 엄마에게 원망하며 산 여자는 고급 일식집 사장까지 되었고, 새로운 주방 직원 면접을 보던중 면접자가 한 충격적인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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