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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당손감’을 열렬하게 챙겨보는 40대 후반 남자입니다.
오늘은 조금 기가 막힐수 있는 저의 지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원래부터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바람난 것을 목격 했고 엄마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았지만 가정을 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항상 노력했습니다.
그런 엄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바람난 여자와 같이 살겠다고 했습니다.
“난 이 여자하고 살꺼니까 알아서들 잘 살아라”

“여보.. 우리 기찬이 봐서라도 다시 생각해보면 안될까요..”
“웃기는 소리 하지마, 내 피땀 흘려 벌은 돈을 저 자식 교육비에 쓰느니..차라리 나에게 투자 할련다”
“제발.. 여보”
저는 이를 지켜봐 오며 결혼에 대한 이미지는 혐오 그 자체였고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를 버린 채, 아니 우리를 버리고 저는 엄마와 둘이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어머니를 호강시키고 싶은 마음에 잠을 줄여가며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저는 서울대 입학에 성공하였고 장학금을 4년동안 빼놓지 않고 받아왔어요. 이후 저는 취업준비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 S물산에 취직할 수 있었어요.

회사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으면서 직장생활에 익숙해져 갔어요. 하지만 이정도로는 어머니의 호강도, 돈도 제가 원하는 만큼 벌지 못한다는 생각에 저는 회사에서 일하며 만난 인맥으로 정말 좋은 기회가 생겨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열심히 한 결과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초반에 시작했던 부동산 투자가 대성공을 하게 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커리어에만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46살이 되었고 어렸을 때 안좋은 기억으로 결혼까지 갈 정도의 연인사이가 되면 저는 항상 아버지가 생각나 연인과 안좋게 끝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에게 대장암이 발견되어 저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는데요. 의사는 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하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였고 저는 어머니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였습니다.
ㅍ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하고 싶은 일이나, 갖고 싶은 것 있으세요?”
(어머니)”사실…. 나는 네가 참한 아내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걸 네가 30대 때는 볼 줄 알았는데.. 그게 많이 아쉽구나”
어머니는 제가 가정을 이루시길 원하셨고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많은 소개팅을 하며 여성분을 만나봤지만, 마음에 와닿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인 마음으로 저는 결혼 중매업체를 통해서 한 베트남 여성분을 소개 받았고 그 여성분은 발랄하고 외적으로도 제 스타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여성분은 어렸지만 생각도 깊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한국말이 서툴고 어눌했지만 저는 그런 모습까지 귀여워보이기만 했어요.

저는 곧바로 어머니께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그래 너가 기찬이 색시구나”
“어머니..제가 ..한꾹말은 부족하지만.. 기찬씨..에게 힘이 되어주는 여자가 될게요!” 라고 하였고 저와 어머니는 이 한마디에 감동을 바로 이여자랑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청혼을 했습니다.
“가영아 나와 결혼해줄래? 내가 평생 너와 함께하고 싶어”
“당연하지 오빠…고마워 내가 잘할게요. 사랑해요..”

서로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리며 저희는 영화의 한장면 같았던 프로포즈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최대한 빨리 예식장을 잡아 결혼 준비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식날 너무 기뻐하시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해 주셨어요.
“네가 늦게라도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룬다니.. 내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맙다 기찬아..그동안 고생 많이했지?”
“어머니..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어머니가 더..더 고생 많으셨잖아요.. 제가 더 잘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니 자식까지만이라도 보게 이 몸이.. 버텼으면 하는구나. 어쨌든 오늘 축하한다 우리 아들”
“손자,손녀 꼭 볼 거니깐 걱정 마시고 오늘 마음껏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그렇게 저희의 저희의 결혼식은 완벽하고도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어요.이후 저희는 신혼여행을 해외로 가게 되었고 그 사이에 저희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갑작스러운 병세 약화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드리고 돌아가신 것 같아서 저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흘러 아내는 1년도 안되서 임신을 하였고 아내의 맛있는 밥과 완벽한 내조로 드라마 같은 화목한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저희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고 아내와 저는 아이를 열심히 보살피며 저와 같은 상처는 받지 않게 소중히 키워왔습니다.

아들은 세상밖으로 어찌나 나오고 싶어 했는지 예정일보다 빨리나온 아들은 인큐베이터에서 몇주간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밖에 못보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 그때는 그렇게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저와 아내는 서로의 손을 꼭잡고 아들을 보며 말했어요.
“여보, 우리 아들 오른쪽 손등에 붉은점 같은게 있는것 같지 않아요?”
“어..? 정말이네요..?”
아들의 오른손에 있는 점은 아들만 가지고 있는 특징이어서 멀리서도 아들을 찾을때면 손부터 보곤 했었습니다.
저는 외근이 많아 아이와 아내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어느날 아내는 저에게 한국에 아이와 둘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심심하고 외롭다는 속사정을 듣게 되었어요.
“오빠.. 한국에 혼자와서 오빠를 만나 아이와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너무 외롭고 심심해요. 저 카페일 배워봐도 될까요? 어머님 보험금 몇년째 안쓰고 있잖아요… 그거 저한테 투자해줘봐요! 내가 멋지게 성공시켜볼게요.”

그 말을 들은 저는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죠.
어머니의 보험금이니 만큼 의미있는 곳에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지금은 사업으로 잘나간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잘나가는 상권에 1층을 임대해서 카페를 하나 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카페일을 한 후 더 생기가 돌며 우울한 것도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날은 아내의 카페에 놀러 갔는데 아내가 알바생이 새로 왔다며 소개를 시켜주더라고요.
아내 또래랑 비슷해 보이는 남자 알바생이었는데 그 남자도 베트남 사람이라고 했죠.
“안녕하세요. 저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한국이름 김철수 라고 합니다.”
“아네 ㅎㅎ 고생 많아요~”
아내는 성실하게 사는 대학생이라 일도 잘한다며 소개를 해 주었죠.

그런데 그 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내와 유독 친한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단순히 일적으로 친한 느낌이 아닌 서로 아주 가까운 사이인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남자의 손엔… 저의 아들과 같은 점이 손등에 있었습니다.
근데 뭐 충분히 그럴수 있는 상황이다보니 ‘그냥 우연이겠지…’ 하고 넘어 갔던것 같아요.
그렇게 저희는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들이 커가며 저와 닮은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어리고 혼혈이기에 그렇다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직해 혈액형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아들은 A형이었고 저와 아내는 둘 다 B형이었습니다.
놀란 마음도 잠시 아내와 아들 모르게 머리 한가닥을 뽑아 바로 친자 검사를 맡겼고 결과는 친자 불일치였습니다.

저는 아내 모르게 철저한 아내의 뒷조사하였고 알고보니 그때 봤던 알바생과 카페 영업이 끝나고 서로 데이트도 하고 그랬다는 보고가 들려 왔더라고요. 저는 아내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상황인지 도대체 내 아들로 알고있는 저 아이는 그 자식 아이인지.. 저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아내는 정말 나쁜 여자였습니다.
그런 아내의 속셈은 한국에서 돈 많은 부자와 결혼을 한 후 이혼자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베트남에서 건물을 사기위해 비자를 얻으려고 한국으로 넘어왔던 것이죠.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곧바로 아내를 찾아가 진짜 이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여보 이게 다 사실이야?아니지..? ”
“……미안해”
“전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라와 한번쯤은 부자로 살아보고 싶었어요…그걸 실현 할 수 있는 건 한국뿐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다예요..! “

“그렇다고 나를 속여? 이건 범죄야 범죄!! 너 우리 아들이 내 친자식이 아닌건 알았어?”
“오빠.. 그건 전혀 몰랐던 내용이에요..”
“몰랐든 알았는..난 널 진짜 믿고 사랑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
이후 저는 바로 이혼소송을 걸어 아내는 한국에서 추방 당하게 되었고 아이는 합의하에 아내가 베트남에 데려가기로 했어요.
그 후 2년간 정신적으로 정말 괴로운 날들을 보냈어요. 그런 저는 머리도 식힐겸 등산을 자주 다녔고 등산 모임에 나가게 되었어요
점점 다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등산모임을 자주 나가게 되었고 거기 회원으로 계신 저와 동갑인 여성분을 만나 재혼하였습니다.

현재의 아내를 만나며 과거의 트라우마와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료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아내를 보며 배울점도 많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저희는 2-3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저에게는 제 삶에 있어 많이 변화된 것 같아요.
저희 부부는 둘다 아이 욕심없이 지내오다가 현재까지도 아이없이 5년째 신혼부부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어렸을 때는 어버지를 보며 ‘결혼’자체에 혐오감을 가지며 살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