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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아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인 저는 누구나 행복해질 기회가 있다고 믿습니다. 안녕하세요, 20년 넘게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한 청년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들의 이름은 강환이라고 하는데요, 또래들 보다 강환이가 말이 트이는 게 너무 늦어서 걱정이 많았던 저는 유치원을 보낸 후부터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래 애들은 서서히 엄마, 아빠 정도는 말하기 시작했는데 항상 멍하게 무언가 하나만 집중해서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던 강환이는 3살 되어도 옹알이조차하지 않았고 결국 발달검사를 해보라는 얘기를 듣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검사에서 어떻게든 문제가 있다는 판정을 받고 싶지 않아서 옆에서 장난감을 들고 계속 붙어있던 저는 결국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눈물을 참고 집으로 돌아가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우면 좋을지 남편과 얘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강환이 자폐 스펙트럼이라고 하네.”
“뭐!? 자폐!? 저거 내 아들 맞아?”
남편은 지금까지 자기 집안에서 그런 정신병자가 나온 적이 없다며 화를 내며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저는 자폐가 정신병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면서 남편의 말을 부정했습니다.
“됐어! 저런 장애있는 정신병자는 책임 못 지니까 네가 혼자서 키우던가 해!”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강환이 우리 아들이야! 우리가 낳은 아이라고!”
크게 다툰 후 늦은 시간에 집을 나간 남편은 며칠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연락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저는 시어머니에게서 먼저 연락이 와서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참나, 저런 애랑 같이 오면 어떡하니.”
“저런 애라뇨? 어머니 손주예요.”
역시나 그 아들의 그 어머니인지 시어머니는 강환이를 부정하면서 보육원에 보내라는 얘기를 하셨고 저는 그럴 수는 없다며 제가 끝까지 책임지며 키우겠다는 말에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이대로 남편이랑 헤어지고 저 장애가진 모자란 애나 키우면서 돈이랑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렇게 평생 살래?”
“병원에 가기 전이랑 다를 게 없는 제 아들입니다. 더는 얘기할 필요도 없겠네요.”
제 단호한 말에 시어머니는 이혼을 하라고 하셨고 저도 알겠다며 말하며 집을 나왔습니다. 며칠 뒤 남편이 이혼 서류를 가져왔고 저는 양육비나 잘 보내달라고 말하며 서로 제 갈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 우리 집안에 먹칠하기 싫으니까!”

남편은 마지막까지 자기만 생각하면서 모진 말을 하며 이별했고, 저는 갈라서서 오히려 후련한 마음으로 강환이에게만 신경 쓰기로 했습니다. 일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 저는 경력이 끊긴지도 오래고 학력도 고졸이어서 제대로 된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집에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공장 야간 생산직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강환이가 자는 동안에 일할 수 있어서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점 혼자 두는 게 불안해졌던 저는 관리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휴게실 안쪽 방에 아이를 재울 수 있게 되었고, 몇 달을 그렇게 지내면서 어느 정도 안정감을 되찾았을 때, 일이 터졌습니다.

“야! 이거 안 놔!”
“으-! 으으으으으-!!”
평소 강환이를 귀여워해주면서 자주 책을 읽어주던 알바 남학생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강환이가 그 학생의 팔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저는 학생에게 사과했지만 쉽게 화가 풀리지 않아서 자폐를 앓고 있다고 말했고 그 사실을 들은 공장 사람들을 정신병이 있는 애를 데려온 것이냐며 저와 강환이를 비난하였고 관리 팀장님도 더는 아이를 데려오지 말라고 하여서 결국 그대로 공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다시 일을 찾기 힘들었던 저는 아들을 안고 여기저기 구직 활동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녔습니다. 혹시나 해서 남편이었던 인간에게 연락을 해봤더니 이미 소식이 닿았던 것인지 “사람 무는 게 짐승이지 사람이야!?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는 말만 들었고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들 하나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미안했던 저는 그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눈물을 흘렸고 다음날 보육원을 찾아갔습니다.
“미안해 강환아… 여기에는 네가 좋아하는 책이랑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야.”
보육원에 도착했지만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고 있던 저는 강환이가 갑자기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는 일을 할 수 없었던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보육원 안에서 꽤나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할아버지가 나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서럽게 우셨어요? 들어오셔서 얘기라도 하시죠.”
“아뇨, 제 아들을 보낼 수가 없어서요…”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아서 이런 분에게 얘기라도 하면 마음에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 따라 들어갔습니다. 마주 앉은 채 강화이의 얘기를 쭉 해드렸고, 참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는 얘기에 공감을 해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기특하게 책을 좋아하는군요. 커서 분명 똑똑한 아이가 될 겁니다.”

강환이를 보고 웃어주시던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가지러 가시더니 책을 한 보따리 가지고 오셨고 자기의 명함도 주셨습니다.
“제가 이 시설의 원장입니다. 보다시피 크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힘이 닿는 데로 돕고 싶어서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아이들이 읽지 않는 좀 낡은 책인데 강환이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건 제 친구의 아들 연락처인데,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집이 가까운 주부를 채점 교사로 구하고 있다며 직접 전화를 하셔서 제 일자리를 구해주셨고 처음 본 저와 아들을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신다며 여러 책과 도서교환권을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해서 눈물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고 원장님은 나중에 잘 되어서 다른 사람들 돕는 훌륭한 가족이 되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방 알바를 시작하게 된 저는 강환이도 공부방을 다니게 하면서 일과 돌보기를 동시에 할 수 있게 되었고 공부방 사장님도 사정을 듣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만 연속으로 일어나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살고 있었더니 어느새 강환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때보다 따돌림도 덜 당하게 되어서 걱정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의 5월, 강환이의 담임선생님께서 학교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놀라서 출근도 미뤄두고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혹시 강환이가 문제를 일으켰나요?”
“아하하, 아닙니다 어머니. 좋은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놀랐던 저는 안심하면서 담임선생님의 얘기를 집중하여서 들었는데, 놀랍게도 강환이가 음악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강환이가 피아노를 엄청 잘 치더라고요. 노래를 들려주면 바로 따라서 치거나 또래 애들이 연주하기 어려워하는 곡도 쉽게 습득하는 걸 보아하니 아마 서번트 증후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소한 단어에 저는 이어지는 자세한 설명에 감탄하며 강환이의 재능을 살려보자 선생님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방과 후에 재능기부로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계신 학원을 찾았고, 음악 선생님께서 강환이를 일주일 정도 가르쳐 주시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니, 강환이는 천재입니다. 분명 콩쿠르에 나가도 어렵지 않게 입상할 것이고,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연주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예고에 입학한 강환이는 실력을 더욱 쌓아서 버클리 음대 입학을 권유받았고, 저는 기쁘면서도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인이 되어도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하기에 저와 함께 외국 생활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지금까지 저축을 해왔어도 터무니없이 부족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 하던 저는 강환이와 함께 보육원을 찾았고, 원장님은 기뻐하시면서 한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우리 보육원 출신 아이들이 성장해서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사업에 성공한 경우가 몇 명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매년 기부를 해서 모인 돈을 장학금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여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로 했는데, 마침 올해 후원받을 사람이 딱 맞게 찾아와줬네요.”
놀랍게도 엄청난 금액의 후원금을 모아두셨던 원장님은 저와 강환이의 해외생활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셨고, 이런 기회를 주신 원장님과 보육원 관계자분들에게 꼭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고 버클리 음대에 입학하게 된 강환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마쳤고 옆에서 각종 배달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던 저는 현재 전세계를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다니는 아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강환이는 제 자랑이고,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랑한다!”
“우리 손주가 잘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저랑 애비가 키우느라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요~”

강환이가 화제가 된 후에 뉴스에서도 보도되자, 자신이 아버지고 친할머니라면서 아이의 육아에 엄청 노력을 쏟아부었고 잘 되어서 자랑스러워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듣자하니 그 모자는 사업을 하려다가 망해서 엄청난 금액의 빚이 생겼고, 시간이 한참 흘러 20년 뒤에 자기 아들이었던 청년이 티비에 나오자 어떻게든 뭐라도 떨어지는 게 없을까 해서 먼저 방송국에 연락을 했었지만, 그 전에 제가 아이를 홀로 키웠다는 정보가 이미 인터넷에 퍼져서 나중에 망신만 당했다는 듯했습니다. 당연히 빚을 감당하지 못 해서 파산 신청을 한 모자는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고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미래에 살고 있는 저는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매년 아들과 기부를 하면서 자선공연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장님께 연락을 드리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연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을 여기서 느끼게되네요~
자폐아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지극정성 보살핀 어머니께 하늘도 감동을 느낀것이지요~
반면 자기 아들 손주가 자폐라고 버린 남편 시부모는 결국 파산된 삶이 되었네요. 이런거 보면 하늘의 뜻은 정해져있는듯 싶습니다.
자폐아들을 끝까지 책임지신 어머니의 노고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앞날에 하늘의 큰축복과 영광이 함께하길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