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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고 하죠, 제 인생도 정말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어릴 적에 생이별한 사람과 이별하거나 고아가 되어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낼 거라는 사실을 말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게임회사에 다니고 있는 20대 중반 여성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저는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물건값을 계산하고 계신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있다가 옆에 있던 장난감 가게에 홀린 듯이 들어갔다가 할아버지와 떨어지게 되었고 울면서 할아버지를 시장에서 찾다가 저녁이 될 때까지 찾지 못하여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고 주소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어렸던 저는 그대로 보호자 없는 고아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육원으로 가게 되었고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자 매일 부모가 없는 걸로 놀림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따돌림을 당했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전에 살았던 그 집에 안 계셨고 소식도 알 수 없어서 정말 세상에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런 저를 제가 지탱하자고 결심하고 공부에만 매진하였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여중을 나와서 명문 여고로 진학했고 공부밖에 모르는 괴짜로 여겨졌지만 저는 보란 듯이 수시로 서울대를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늘나라에 계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는 손녀가 된 것만 같아서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성인이 되어 대학 생활과 과외 알바로 동갑내기들이랑은 다르게 또 공부만 하는 충실한 생활을 보내다가 게임회사에 관심이 생겨 대학을 졸업하고 마케팅 팀으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회사 생활이 학창 시절보다 훨씬 인정받을 수 있고 즐거웠기에 성과를 내는 것에 큰 만족을 얻으면서 사회생활을 했고, 프로젝트를 같이 담당했던 직장 상사인 김태선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에는 관심도 없었던 제가 어느새 그 사람에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5살 연상이었지만 어떤 일을 하던 의지가 되고 솔선해서 저를 도와주는 모습이 너무 든든했고 강한 척하며 살아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의지할 수 있는 나만의 아군을 만들고 싶었던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교제를 시작했고 이른 나이인 23살에 결혼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태선 오빠는 곧 서른이 다 되어가기에 결혼에 대해서 적극적이었고 저는 긍정적으로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 교제를 이어 나갔습니다.

태선 오빠의 집에 처음 방문하는 날, 저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좋은 인상의 품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제 가족을 얘기하는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시더니 고아와는 자기 아들과 결혼시킬 수 없다며 반대하셨고, 아버지를 몇 년 전에 잃으셔서 아들을 엄청 아끼신다는 얘기를 들으며 저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오빠와 함께 설득의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해서 시어머니가 되어도 저에 대한 취급이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서 승진까지 했지만, 남편에 비하면 연봉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퇴근 후에 피곤해 하는 저를 보시고는 “고아가 무슨 회사를 다니겠다고… 그만 때려치우고 집안일이나 하면서 신랑 뒷바라지나 해!”

같은 말씀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하셨고, 계속되는 시어머니의 무시와 하대에 어느새 남편도 동조하기 시작해서 회사에서 힘들면 전업주부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자주 얘기했습니다.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저는 좋아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면서 하루 종일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하며 살았고, 남편은 자꾸 야근으로 늦게 퇴근하더니 점점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휴일과 주말에도 자주 집을 비워서 수상하게 여긴 제가 남편이 자고 있을 때 휴대폰을 들여다봤더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는커녕 바람피운 사실을 시어머니가 아시게 되면 “네가 아내 노릇을 얼마나 못 했으면 다른 여자를 만나겠니!? 그러니까 애도 안 생기지!” 같은 말만 듣게 될 것 같아서 오히려 제가 이 사실을 숨겨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울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온갖 하대와 무시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내가 있을 장소는 여기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면서 살았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준비를 위해서 시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께서 어쩐 일로 같이 가겠다고 하셔서 모시고 나왔습니다. 곧 남편의 생일이어서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고 싶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식재료를 구매했고 저 혼자서는 옮기기 버거울 정도의 짐을 저 혼자 낑낑거리며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자주 가던 채소 가게로 갔습니다.
“어? 저, 아가씨. 잠깐만요.”

“네? 저요?”
채소를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낯설지 않게 들리는 목소리의 할아버지가 저를 보고 말을 거셔서 잠깐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목걸이… 설마 미진이 아니니?”
할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착용했던 은목걸이를 보시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셨고 저는 오랜 기간 동안 차미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기에 혜정이라는 이름을 듣고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어요?”
“뭐하는 거야 지금? 할아버지, 누구신데 이러시는 거예요? 미진이 너는 빨리 짐이나 들어.”
극적인 가족 상봉의 순간을 보고 찬물을 끼얹으며 짜증을 부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저는 다시 짐을 들었지만 할아버지는 친자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머리카락 한 가닥만 달라고 하셨고 저는 바로 뽑아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하나 주시면서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하셨고 저는 알겠다고 하면서 어릴 때처럼 시장에서 헤어졌습니다.

“여보세요? 미진아, 유전자 검사 결과 99.9퍼센트야. 내 손녀 미진이가 맞아…!”
전화기 너머로 할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고 저 역시 결과를 전달받고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살아계셨고 심지어 시장에서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기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며칠 뒤 할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할아버지, 명함에 써져있는 회사 혹시 남편이 다니고 있는 게임회사랑 이름이 똑같아서 그러는데, 게임회사 맞아요?”
받았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지만 명함에는 M 게임즈라고 써져있었기에 여쭤봤더니 할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습니다.

“진짜요?”
자세히 얘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전재산을 친구 아들에게 투자해서 사업 확장을 도와주셨고, 회사가 대성하자 지분을 80퍼센트 정도 가지게 된 명예 회장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은 채 얘기를 계속 들었고 할아버지의 재산을 저를 위해서 다 쓰시겠다고 하시기에 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제 볼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남편이 과장으로 있다고? 그리고…”

저는 그동안 쌓여있던 얘기를 할아버지와 하면서 현재 처한 상황과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복직을 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며칠 뒤 저는 대리로 복직하여서 다시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 남편과는 이혼하여 시어머니 집에서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전 남편이었던 그 사람을 혼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던 날들을 떠올리면서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부서만 옮겨달라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현재 저는 고아도 아니게 되었고 저를 아껴주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25살이 되었습니다. 다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 생각하기에 일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사연을 보내는 지금 이 순간도 제가 이렇게 다시 행복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인생은 재밌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